[방상근 리더십에세이]

 

도쿄에서 만난 세종시대 문헌들



방상근(세종리더십연구소 선임연구원)


지난 2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세종시대 만들어진 문헌의 조사를 위해서 일본(동경)에 다녀왔다. “세종시대 문헌DB 사업”의 연구책임자인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의 박현모 소장과 김윤주 전수조사팀장, 그리고 필자가 동행했다. 세종(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헌을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에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일관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조선의 중요한 국가적 문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유로 왠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그래도 연구자로서 그러한 문헌들의 서지사항과 보존상황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으로 일본출장을 준비하였다.
 
우리는 일본 궁내청 서릉부(書陵部)에 공문을 보내어 세종시대 문헌 4편(『송양휘산법』, 『향약구급방』, 『세의득효방』, 『의방유취』)에 대해 열람을 신청하였고, 얼마 후 허가서가 우편으로 도착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열람에는 제한이 있었다. 우리가 요구했던 열람과정에 대한 촬영이나 동영상 촬영은 허가되지 않았고, 문서에 대해서도 사진촬영이 허가되지 않았다. 지정된 열람 장소에서의 필사(筆寫)는 허락되었고, 촬영을 원하는 부분에 대해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담당직원이 촬영(복사) 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열람이라도 허가되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출발하였다.
 
궁내청 서릉부의 열람실에서

조사작업은 일본에 도착한 이튿날에 이루어졌다.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서 궁내청 서릉부를 방문하여 전수조사작업에 시작했다. 오전에는 『송양휘산법』과 『향약구급방』을 열람하고 주요 서지사항과 내용에 대한 확인 작업을 하였다. 특히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페이지에 간지를 넣고 촬영(복사)신청서를 작성하여 직원에게 제출하였다. 나는 『송양휘산법』이 단지 ‘산법’을 다룬 수학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내용을 확인하면서 그것이 농사에 있어서의 토지측량에서부터 군사에 있어서의 진법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산법’이 당시의 국가경영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텍스트였는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향약구급방』은 태종 17년(1417년)과 세종 9년(1427년)에 편찬되어 우리나라에 전해 오는 가장 오래된 의약서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되어 있는데, 이번에 서릉부에서 원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히 향약(鄕藥)으로 백성들을 치유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약재나 질병의 한자표현을 일반 백성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로 차자(借字)하여 기록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서릉부 근처의 마이니치(每日)신문사 지하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은 후 잠시 서릉부 일대의 공원을 산책했다. 본래 에도시대 쇼군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세워진 에도성(江戶城)의 천수각은 그 후 전소(全燒)되어 지금은 기단만 남아있다. 동경의 한 복판에 펼쳐진 공원과 고색창연한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 황거(皇居)는 일본인들의 내면 한 가운데에 여전히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천황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에 다시 서릉부에서 『세의득효방』과 『의방유취』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세의득효방』의 경우 한국에서 미리 조사해 간 내용과 차이나는 부분(완질여부와 판본 형태)을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의방유취』는 그 분량이 방대한 관계로 모두 열람하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열람했다. 대신 주요 부분에 대해서 복사신청을 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허가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촬영을 하였다.
 
자문회의, 우에노공원, 그리고 동경대

서릉부에서의 조사를 마치고, 일행은 진보초(神保町)에 있는 고서점 거리에서 『도쿠가와실기』 등에 대한 문헌 조사를 진행했다. 일본과 중국 등의 실록은『세종실록』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조사하는 게 우리 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희귀한 고서(古書)들을 그렇게 많이 소유한 서점들이 늘어서 있고, 그 서적들이 꾸준히 구입되고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에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점들은 책의 보존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영업상의 비밀을 위해서인지 고서들에 대한 사진촬영을 가로 막았다.
 
저녁 시간에는 메이지대학 리버티타워에서 이 학교에 방문학자로 와계신 고려대 심경호 교수님과 교토 타치바나대학의 카바 토요히코 교수님을 만났다. 일본 소재 문헌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인 심경호 교수의 자문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우리팀은 일본에 오기 전부터 미리 심경호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 날에 있었던 서릉부 문헌조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향후 ‘세종시대문헌’에 대한 연구와 ‘세종연구’의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고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심경호 교수님은 세종실록의 정본화작업의 필요성과 함께 박정희시대에 있었던 세종연구의 득과 실을 잘 살펴서 세종을 너무 우상화하지 않으면서 균형감 있게 연구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일행이 동경에 머물던 3일차(2월 11일)는 마침 일본의 국경일(건국기념일)이었다. 이 날은 궁내청과 국립공문서관이 모두 휴관했던 관계로,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오전에는 우에노(上野)에 있는 동경국립박물관과 동양관을 견학했다. 국립박물관에서는 동북지방의 6개 현(縣)을 대표하는 불상들을 결집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일본인들의 내면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불교의 영향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또한 동양관에서는 동양의 역사와 문명속에서 일본의 역사와 문명을 보여주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오후에는 동경대학교를 방문하였다. 대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스다(安田)강당과 아카몬(赤門), 근대일본을 이끄는 관료들을 양성했던 법문관(法文館), 근대일본을 건설했던 기술자들을 배출한 공학관(工學館), 그리고 고풍스러운 도서관 등 이들 건물 속에 담겨져 있는 치열했던 근대화의 노력과 정신을 교정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일행은 대학 내의 커피숍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전날 있었던 문헌조사의 성과와 자문회의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고 향후의 세종연구와 세종리더십연구소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논의하기도 하였다.
 
국립공문서관을 뒤로 하고

4일차(2월 12일) 오전 우리팀 일본국립공문서관으로 향했다. 아직 조사를 하지 못한 『역대세년가』를 열람하기 위해서 였다. 국립공문서관은 인터넷검색과 신청으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고, 서릉부와는 달리 열람자의 사진촬영도 허용해주었다. 『역대세년가』는 전반에 중국의 역사를, 후반에는 동국(東國,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책의 서문에는 나라의 치란(治亂)과 존망(存亡)을 이루는 기틀을 잘 살피고 권선(勸善)과 징악(懲惡)의 거울로 삼아서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했던 세종의 뜻이 잘 드러나 있었다. 역사와 정치사상을 공부하는 우리 일행들에게 이 책은 단지 한 권의 전수조사대상문헌으로써만이 아니라, 세종이 말하고자 했던 ‘국가경영과 정치리더십’의 요체를 전해주는 ‘바이블’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모든 페이지에 대한 사진촬영을 했고, 출력하고 책으로 제본해서 세종이 뜻하셨던 것처럼 소중한 역사적 귀감으로 간직하고자 하였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제한된 열람 범위 때문에 큰 기대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현장에서 부딪히고 조사하면서 얻게 된 것은 기대이상이었다. 단순한 열람과 복사 신청 이외의 많은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고, 자문회의를 통해서 연구팀과 연구소의 사명에 대해서 새롭게 자각하게 되었고, 우리 앞에 놓인 과업들을 추진해 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든든한 우군도 얻게 되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이 있는데, 4일간의 여정을 뒤돌아보면서 그 말이 새삼 실감나게 다가왔다.  출장 준비과정과 추진과정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여기에 다 소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종시대의 귀중본 문헌들을 국내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일념들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장차 우리나라에서 이 문헌들을 쉽게 만나고 읽을 수 있기를 절실히 바라면서, 내부 공사로 어수선한 일본 국립공문서관을 나섰다.


 

(사)한국형리더십개발원


찾아가는 뉴스미디어 넘버원타임즈

[2015. 3. 3. www.No1times.com]


Posted by no1t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