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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리더십에세이] 대한제국,토론문화를 꽃피우다

no1tv 2015. 2. 17. 11:00

[김영호 리더십에세이] 대한제국,토론문화를 꽃피우다



19세기 말의 조선을 생각하면 한 장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것은 프랑스 출신의 풍자화가 조르주 비고가 그린 ‘낚시질’이란 그림이다. 일본인과 청인이 연못에 마주 앉아 조선[corre]이란 탐스런 물고기를 잡으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데 다리 위에는 뒤늦게 도착한 러시아 낚시꾼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고종은 경연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총체적 위기의 시대에 조선의 국왕 고종은 백성들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했으며 어떻게 정책을 결정했을까? 고종 역시 경연을 매우 중시했다. 재위 초반 10여 년 동안 약 1,300회의 경연을 열었다. 개화파의 영수 박규수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경전과 역사는 물론 국정을 운영하는 제왕학을 성실하게 배웠다. 자신보다 꼭 100년 먼저 태어나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정조를 정치적 모범으로 삼았던 고종은 신하들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서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경연을 통해 고종의 학문적 역량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고, 그 범위도 전통과 근대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종이 정치 현장에서 자신의 지식과 군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올바른 정책을 제시했던 사례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친정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나도록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민씨 척족들의 부정부패를 근절하지 못했고, 신식군대를 육성하려다가 구식군대를 소외시켜 임오군란이라는 초유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대를 불러들이는 실정을 거듭했다는 사실이다. 나라의 운명을 국왕과 정부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백성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대한제국기근대 회의법과 토론문화가 전파되다


 1895년 12월,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난 고종은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박정양 내각을 세웠다. 그 무렵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고종의 체포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정부의 초청을 받고 고문관 자격으로 귀국했다. 서재필은 박정양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에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공론을 수렴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었다. 그는 <독립신문> 사설에서 “무슨 일이든지 공사간에 문을 열어놓고 서로 의논하여 만사를 작정하고 실상과 이치와 도리를 가지고 햇빛 있는 데서 말도 하고 일도 하는 것이 나라가 중흥하는 근본”이라며 열린 토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흥미롭게도 같은 해 9월, 고종도 의정부에 근대식 회의법을 도입했다. 칙령 제1호로 반포한 <의정부 관제 제2관 회의(會議)>에 이에 관한 세밀한 규정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6조) 의정은 회의에 부칠 사항을 미리 갖추어 회의 좌석에 제출하되 각 해당 사항의 의안을 베끼어 1건씩 각 참정에게 주어 검열하고 의견을 첨부하게 하며 1주일 내로 회의를 열도록 한다. 회의에 부칠 토의 안건이 많아서 부득이한 때에는 매주 3회씩 회의를 연다.


-(제7조) 회의할 때에는 찬정이 3분의 2 이상이 모여야 회의를 연다.

 

기초적이고 무미건조한 회의 매뉴얼에 불과하다. 이보다는 오히려 협성회 학생들의 토론 규칙이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1896년 가을,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미국 민주주의를 강의하면서 토론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자 깊이 공감한 학생들이 나서서 ‘협성회(協成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협’은 남과 더불어 마음을 하나로 한다는 뜻이고, ‘성’은 협을 통해 모은 민심으로 개화된 세상을 이루고자 한다는 뜻이다. 협성회 학생들은 논의를 통해 아래와 같은 토론회의 세부 규칙을 만들었다.


-말하는 사람들은 공평한 발언시간을 가져야 하고, 정해진 방식에 따라 말해야 한다.

-토론은 찬성과 반대의 양편으로 나뉘어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상대방 주장을 반박해 가는 것이다.

-양측은 토론할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명확하게 찬성과 반대로 나뉠 수 있는 주제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토론을 하는 목적은 언제나 현 상황을 개선하려는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토론의 주제가 정해지면, 주제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되 반드시 현 상황을 개선하거나 현재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설정해서 만들어야 한다.

-찬성부터 발언한다. 찬성 측은 왜 이 제안이 중요한지에 대한 배경 설명부터 시작하여, 반드시 그것이 행해져야 하는 이유를 하나씩 차례로 말한다. .......

 

협성회 학생들의 이러한 토론회의 규칙은 지금보아도 참고해야할 내용이 많다. 11월 말 협성회 창립총회에서 열린 첫 토론회의 주제는 <국문과 한문을 섞어 씀이 가(可)함>이었다. 토론회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을 때,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관료들과 독립협회 회원들도 배재학당의 협성회 토론에 가서 배울 것을 권했다.


1897년 7월, 배재학당 협성회 학생들의 토론 시범을 보기 위해 학부대신 민종묵을 비롯한 600여 명의 청중들이 몰려들었다. <동양의 여러 국가는 서구의 방식을 빌려 개화해야 한다>는 논제로 진행된 공개 토론회를 보고 큰 자극을 받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토론회 도입을 의결했다. 독립협회는 같은 해 8월에 <조선의 급선무는 교육이다>라는 논제를 시작으로 매주 일요일 오후가 되면 독립관에서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협회가 해산되는 1898년 12월까지 총34회 진행된 토론회의 주제는 신교육 진흥(3회), 산업개발(5회), 민족문화(1회), 미신타파(3회), 위생과 치안(3회), 자주독립(3회), 신문보급(1회), 대외정책(1회),수구파 비판(2회), 이권반대(2회), 자유 민권(5회), 의회설립(1회), 독립협회 지회 설치(1회) 등 다양한 현안을 주요의제로 다루었다. 훗날 서재필은 당시 독립협회의 토론회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했다.

 

“토론 주제는 대개 정치와 경제문제였지만, 종교와 교육에 관한 문제도 토론에서 빠트리지 않았다. …나는 한국 사람이 연설엔 선천적인 재능이 있는 것으로 믿는다.…그밖에 평등한 입장에서 갖가지 논제를 토의한 그 조용하고도 질서정연한 의사 진행 방법은 한국 청년층과 그리고 토론회에 참여했던 회원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협성회를 이어 독립협회가 1896년부터 해산되는 1898년까지 약 3년 동안 토론회를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고종의 불신으로 결국 해산되었고, 이를 주도했던 서재필은 강제로 추방되다시피 조선을 떠나야했다. 그 뒤의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았다. 이때 우리나라에 보급된 토론회는 왕조에서 공화제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칙과 목적에 충실한 토론문화의 회복을 위해


대한제국기에 근대식 회의와 토론회를 수용하면서 고종황제와 독립협회 회원들 모두 귀중한 유산을 놓쳐버렸다. 그것은 500년 역사를 이어온 조선왕조 최고의 회의법인 경연의 지혜를 계승하려는 노력이다. 현재 우리의 자세도 12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은 조리 있고 풍성해보이지만, 고전에 축적된 지혜를 토대로 당면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해 가는 전통은 찾을 수 없다. 


김영호(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원)



(사)한국형리더십개발원

www.klead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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